7세계 : 붉은 검 -사도②-
- 진청룡전설
- 754
- 2
해가 뜨자 사도는 노엘을 깨웠다. 수프와 빵이 준비되어있었고 늘 그랬듯이 사도는 졸린 기색이 없었다.
“수도로 가려면 배를 타는 편이 빠르니까 코네스로 갈 생각인데.”
“바다로 가?”
“그래.”
“위험하지 않을까?”
“폭풍이 부는 시기가 아니니까 수중마물과 마주치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아.”
“수중마물?”
“가끔씩 수중마물이 배를 공격해서 가라앉히는 일이 있지.”
“괜찮을까?”
“아마도 괜찮을걸. 수중마물은 깊은 곳에 살아서 수면 가까이 올라오는 일이 적거든.”
“그럼 가자. 배는 처음이야.”
“멀미할 몸은 아니니 괜찮겠지.”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정리를 하고 방향을 어제와 다르게 잡았다. 그렇게 순조롭게 3일을 걸어서 늦은 밤에야 코네스의 한 여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수도로 가는 배를 물어보니 수도까지 가는 배가 없었다. 수도에 가려면 코네스와 수도의 사이에 있는 일린이라는 섬까지 가서 수도로 가는 배를 타야했다.
“일린은 어떤 섬이지?”
“살기 좋죠. 큰 섬이라 농사지을 땅도 충분하고 물고기도 많이 잡히고 마물도 없어서 사는 사람이 제법 많아요. 바닷길의 중앙에 있어서 대부분의 배들이 거치기 때문에 오가는 상인도 많아서 한 달 정도만 지내면 대부분의 물건은 거의 구할 수 있다고 해요.”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데?”
“뱃사람들이 말하기로는 10일에서 15일 정도 걸린다던데요.”
“알려줘서 고맙다.”
“손님에게 이정도 쯤이야 당연하죠. 일린으로 가는 배는 거의 항상 있어요.”
사도는 여관에서 일하는 소년에게 물어서 몇 가지를 알아내었다. 항구에 정박해있는 배들의 수로 볼 때 일린으로 가는 배를 타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어려울 일이 없는 게 당연했다. 최근에는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심심해본 적이 있었던가?”
노엘은 자고 있었기에 사도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도는 오랜만에 창문가에서 달빛을 받으며 사색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된 건 노엘을 키우게 되면서부터였다. 조금 사납고 건방지던 성격은 부드러워졌고 점점 무표정해졌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대부분 항상 할 일이 있었고 피를 보는 일도 자주 있었다. 혼자일 때도 많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다니는 일도 많았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 많았고 가끔씩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도 이제는 옛날 추억인 것 같았다.
부모님의 얼굴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면서 생각할 틈이 없었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살아있을 리가 없는 부모님은 생각해봤자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스승과 친구들이 얼굴도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네. 다들 어떻게 됐을까?’
스승은 죽었을 것이다. 스승은 사도의 부모보다 나이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사도의 나이가 20이 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좋은 말상대였고 조언자였지만 건방진 성격이었고 잘난 척을 많이 했다. 그러나 실제로 잘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그에게 충고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죽었을지도 모르고 살아있다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거나 예전처럼 뭔가 할 일을 쫓아다니고 있겠지만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자꾸 마주치게 되는 사건과 사람들을 쫓다보니 어느 새 홀로 떠돌이가 되어있었다. 그런 사실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13년 전에 마주쳤던 사건이 해결되고 여유가 생겼을 때 엉망이 된 작은 마을에서 살아있는 노엘을 발견한 것은 새로운 사건이자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노엘과 같이 다니는 것이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키우면서 정이 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자라서 더 이상 자신이 키워줄 필요가 없을 지도 몰랐다. 더 이상 노엘에게 신경을 쏟지 않아도 된 이 순간 비로소 일이 끝난 셈이고 여유가 생겨서 깨달을 틈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참 많은 일을 했군.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 내 나이도 모르겠군. 내가 왜 여기있는지도.”
사도는 허리에 매어진 두 개의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칼집과 손잡이는 물론 검신까지도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13년 만에 칼집을 나온 검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13년이나 칼집에 박혀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멀쩡하군.”
“음….”
“잠꼬대를 하네. 피곤했나.”
노엘이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곧 저 모습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는 별다른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감정이 무뎌진 것 같았다. 확실히 이런 생활이 싫증이 난 것 같았다. 피 냄새도 가물가물했다. 너무 많은 것을 해온 것 같았다.
“역시 세상엔 문제가 필요한 건가.”
사도는 문득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다가 오른쪽 귀에 달린 낡은 귀걸이를 만졌다.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사도는 귀걸이를 떼어서 무엇인지 한참을 바라보다가 오래 전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까지 달고 있었군.”
귀걸이의 다른 짝을 가진 사람은 오래전에 죽었으니 달고 있어봤자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수십 년이나 달고 있었다. 그만큼 생각할 틈이 없는 시간을 살아온 것이다.
사도는 귀걸이를 꽉 쥐었다. 쥐어진 손의 손가락 사이로 빛이 번쩍거렸다. 다시 펴진 손에는 새까맣게 타서 무엇이었는지 알 수도 없게 부서져버린 조각만이 남아있었다. 사도는 그것들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오른쪽 귀를 만져보니 귀걸이의 흔적인 구멍이 만져졌다. 손가락으로 귀를 주물럭거리자 구멍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버렸다.
“노엘, 그만 헤어질 때가 온 것 같다. 수도로 가면 지낼 곳을 찾아줄게.”
사도는 잠든 노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노엘이 잠꼬대를 했다. 사도는 자기 침대에 누웠다. 귓가가 이상하게 허전했다. 항상 자신에게서 무언가가 떠나갔고 그럴 때마다 찾아오는 허전함이 머무르는 건 잠시였다. 지금껏 자신을 떠나지 않은 것은 두 자루의 붉은 검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붉은 검에 별다른 애착을 가지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는 좋은 검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연하기 때문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다. 그러나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당연한 것일 뿐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잃지 않을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게. 두 번 다시 소중한 것을 잃는 비참함을 느끼지 못하게.”
사도는 창문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도 참 헛소리를 다하는군. 달빛 때문에 너무 감상적이 되어버린 건가.”
사도는 눈을 감았다. 졸리지도 않았는데 그날 사도는 깊게 잠들었다. 다음날 노엘이 일어나서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노엘은 그날 처음으로 사도를 깨우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여관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두 사람은 배를 탔다. 생각대로 일린으로 가는 배는 많아서 쉽게 탈 수 있었다. 배는 일찍 출발했고 항구가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배에는 뱃사람들 말고도 사람이 많았다.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노엘은 멀미를 하지 않았다.
“멀미하는 거 힘든가봐?”
“멀미하는 사람들만 봐도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가지?”
“응. 그런데 난 왜 안 해?”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 단련이 된 사람들도 있고.”
“오빠도?”
“나도 원래 안 해.”
두 사람은 갑판으로 나갔다. 끝없는 바다만이 보이고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꽤나 심심한 풍경이건만 처음 보는 노엘은 신기한 듯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노엘만이 아니라 다른 몇 명도 마찬가지인 듯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가볼래?”
“가볼래!”
사도는 노엘을 데리고 돛대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선원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다시 자기 일에 집중했다. 전망대는 갑판보다 훨씬 높았고 보이는 풍경은 역시 바다뿐이었지만 햇빛이 반사되는 각도가 달라서 갑판에서 보는 것과는 달랐다.
“평화롭군. 보통은 이런 평화로운 때에 수중마물이 나오던데.”
“손님, 제발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경험이라서 말이지.”
사도가 진지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다행히 일린에 도착하기까지 심심한 항해만 계속되었을 뿐 마물의 습격은 없었다. 일린에 도착하고 다음 날, 두 사람은 수도로 가는 다른 배를 탔다. 수도로 가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고 배도 상당히 컸다.
“잘생긴 사람이랑 예쁘게 생긴 사람이 많네.”
“돈 많은 상인이나 수도에 사는 부자들, 혹은 귀족들이 배에 탔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수도에는 저런 사람들이 많아?”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많지.”
사도가 말했다. 사도는 수도에 가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수도 같은 곳에 가면 또 무슨 사건이나 사람과 마주치게 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면 노엘에게 지낼 곳만 마련해준 후에 빨리 수도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카리아를 오랫동안 못 만났군. 나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은 비추러 가야겠지.’
이런저런 생각이 사도의 머릿속을 지나쳤다. 배가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사도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노엘에게 들키지 않게 무표정에 평소 같은 행동을 유지했다. 노엘은 사도와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배는 순조롭게 바다를 달려 수도의 항구에 닿았다. 항구부터 사람이 많고 크고 높은 건물들이 보였다.
“곧 헤론에 닿습니다! 내리실 분들은 준비하십시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배에서 내린 사도는 가장 먼저 무기상을 찾아갔다. 연습용 검을 팔아버리고 검 두 자루를 샀다. 좋은 검이었지만 그만큼 비쌌다. 하지만 사도는 늘 그랬던 것처럼 돈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도는 검 한 자루를 노엘에게 주고 한 자루는 자신의 아공간에 넣었다. 필요한 물과 소금도 사서 아공간에 넣은 후에는 적당한 여관을 찾아 방을 구했다. 여관에 방을 잡은 후에 사도는 노엘을 데리고 수도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수도의 거의 대부분을 돌아보는데 며칠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날도 다른 때처럼 여관에 돌아왔다. 노엘은 평소처럼 잠들었고 사도는 평소처럼 잠든 척하다가 눈을 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사도는 조용히 문을 움직여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는 아직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사도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자리를 떠났지만 사도는 계속 자리를 지켰다. 모두가 자리를 떠나고 사도와 여관 주인인 부부만이 남게 되자 사도는 두 사람을 불렀다.
“주문하실 겁니까?”
“아니,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손님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는 부탁입니다.”
“네? 무슨 부탁입니까?”
“나와 같은 방에서 지내는 여자, 이름이 노엘입니다.”
“그 예쁜 아가씨요?”
“이곳에서 지내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
“이곳에서 지내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사정인지 자세히 말씀을 해주셔야죠.”
“언제까지 노엘이 저를 따라 떠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 당신들에게 노엘을 맡긴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떠나버리면 동생분이 슬퍼할 텐데요.”
“동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빠라고 부르는 걸 제 귀로 분명히 들었는데요?”
“노엘의 작은 마을은 마물들로 인해 망가졌고 가족들은 죽었습니다. 저는 그곳을 지나치다가 생존자인 노엘을 발견했습니다. 5살이었죠. 그래서 그냥 제가 데리고 다니며 키웠습니다. 그래서 저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18세입니다. 더 이상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죠.”
“그래서 떠나겠다는 겁니까?”
“지낼 곳만 있으면 전 더 이상 노엘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검술도 가르쳤으니 자기 몸을 지킬 정도는 됩니다. 노엘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저희 아이라고 생각하죠.”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아이가 없나보네요. 잘 부탁합니다.”
“지금 가는 겁니까?”
“아마 내일 아침이면 헤론에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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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로 가려면 배를 타는 편이 빠르니까 코네스로 갈 생각인데.”
“바다로 가?”
“그래.”
“위험하지 않을까?”
“폭풍이 부는 시기가 아니니까 수중마물과 마주치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아.”
“수중마물?”
“가끔씩 수중마물이 배를 공격해서 가라앉히는 일이 있지.”
“괜찮을까?”
“아마도 괜찮을걸. 수중마물은 깊은 곳에 살아서 수면 가까이 올라오는 일이 적거든.”
“그럼 가자. 배는 처음이야.”
“멀미할 몸은 아니니 괜찮겠지.”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정리를 하고 방향을 어제와 다르게 잡았다. 그렇게 순조롭게 3일을 걸어서 늦은 밤에야 코네스의 한 여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수도로 가는 배를 물어보니 수도까지 가는 배가 없었다. 수도에 가려면 코네스와 수도의 사이에 있는 일린이라는 섬까지 가서 수도로 가는 배를 타야했다.
“일린은 어떤 섬이지?”
“살기 좋죠. 큰 섬이라 농사지을 땅도 충분하고 물고기도 많이 잡히고 마물도 없어서 사는 사람이 제법 많아요. 바닷길의 중앙에 있어서 대부분의 배들이 거치기 때문에 오가는 상인도 많아서 한 달 정도만 지내면 대부분의 물건은 거의 구할 수 있다고 해요.”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데?”
“뱃사람들이 말하기로는 10일에서 15일 정도 걸린다던데요.”
“알려줘서 고맙다.”
“손님에게 이정도 쯤이야 당연하죠. 일린으로 가는 배는 거의 항상 있어요.”
사도는 여관에서 일하는 소년에게 물어서 몇 가지를 알아내었다. 항구에 정박해있는 배들의 수로 볼 때 일린으로 가는 배를 타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어려울 일이 없는 게 당연했다. 최근에는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심심해본 적이 있었던가?”
노엘은 자고 있었기에 사도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도는 오랜만에 창문가에서 달빛을 받으며 사색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된 건 노엘을 키우게 되면서부터였다. 조금 사납고 건방지던 성격은 부드러워졌고 점점 무표정해졌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대부분 항상 할 일이 있었고 피를 보는 일도 자주 있었다. 혼자일 때도 많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다니는 일도 많았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 많았고 가끔씩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도 이제는 옛날 추억인 것 같았다.
부모님의 얼굴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면서 생각할 틈이 없었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살아있을 리가 없는 부모님은 생각해봤자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스승과 친구들이 얼굴도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네. 다들 어떻게 됐을까?’
스승은 죽었을 것이다. 스승은 사도의 부모보다 나이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사도의 나이가 20이 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좋은 말상대였고 조언자였지만 건방진 성격이었고 잘난 척을 많이 했다. 그러나 실제로 잘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그에게 충고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죽었을지도 모르고 살아있다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거나 예전처럼 뭔가 할 일을 쫓아다니고 있겠지만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자꾸 마주치게 되는 사건과 사람들을 쫓다보니 어느 새 홀로 떠돌이가 되어있었다. 그런 사실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13년 전에 마주쳤던 사건이 해결되고 여유가 생겼을 때 엉망이 된 작은 마을에서 살아있는 노엘을 발견한 것은 새로운 사건이자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노엘과 같이 다니는 것이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키우면서 정이 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자라서 더 이상 자신이 키워줄 필요가 없을 지도 몰랐다. 더 이상 노엘에게 신경을 쏟지 않아도 된 이 순간 비로소 일이 끝난 셈이고 여유가 생겨서 깨달을 틈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참 많은 일을 했군.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 내 나이도 모르겠군. 내가 왜 여기있는지도.”
사도는 허리에 매어진 두 개의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칼집과 손잡이는 물론 검신까지도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13년 만에 칼집을 나온 검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13년이나 칼집에 박혀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멀쩡하군.”
“음….”
“잠꼬대를 하네. 피곤했나.”
노엘이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곧 저 모습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는 별다른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감정이 무뎌진 것 같았다. 확실히 이런 생활이 싫증이 난 것 같았다. 피 냄새도 가물가물했다. 너무 많은 것을 해온 것 같았다.
“역시 세상엔 문제가 필요한 건가.”
사도는 문득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다가 오른쪽 귀에 달린 낡은 귀걸이를 만졌다.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사도는 귀걸이를 떼어서 무엇인지 한참을 바라보다가 오래 전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까지 달고 있었군.”
귀걸이의 다른 짝을 가진 사람은 오래전에 죽었으니 달고 있어봤자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수십 년이나 달고 있었다. 그만큼 생각할 틈이 없는 시간을 살아온 것이다.
사도는 귀걸이를 꽉 쥐었다. 쥐어진 손의 손가락 사이로 빛이 번쩍거렸다. 다시 펴진 손에는 새까맣게 타서 무엇이었는지 알 수도 없게 부서져버린 조각만이 남아있었다. 사도는 그것들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오른쪽 귀를 만져보니 귀걸이의 흔적인 구멍이 만져졌다. 손가락으로 귀를 주물럭거리자 구멍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버렸다.
“노엘, 그만 헤어질 때가 온 것 같다. 수도로 가면 지낼 곳을 찾아줄게.”
사도는 잠든 노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노엘이 잠꼬대를 했다. 사도는 자기 침대에 누웠다. 귓가가 이상하게 허전했다. 항상 자신에게서 무언가가 떠나갔고 그럴 때마다 찾아오는 허전함이 머무르는 건 잠시였다. 지금껏 자신을 떠나지 않은 것은 두 자루의 붉은 검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붉은 검에 별다른 애착을 가지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는 좋은 검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연하기 때문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다. 그러나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당연한 것일 뿐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잃지 않을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게. 두 번 다시 소중한 것을 잃는 비참함을 느끼지 못하게.”
사도는 창문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도 참 헛소리를 다하는군. 달빛 때문에 너무 감상적이 되어버린 건가.”
사도는 눈을 감았다. 졸리지도 않았는데 그날 사도는 깊게 잠들었다. 다음날 노엘이 일어나서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노엘은 그날 처음으로 사도를 깨우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여관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두 사람은 배를 탔다. 생각대로 일린으로 가는 배는 많아서 쉽게 탈 수 있었다. 배는 일찍 출발했고 항구가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배에는 뱃사람들 말고도 사람이 많았다.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노엘은 멀미를 하지 않았다.
“멀미하는 거 힘든가봐?”
“멀미하는 사람들만 봐도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가지?”
“응. 그런데 난 왜 안 해?”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 단련이 된 사람들도 있고.”
“오빠도?”
“나도 원래 안 해.”
두 사람은 갑판으로 나갔다. 끝없는 바다만이 보이고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꽤나 심심한 풍경이건만 처음 보는 노엘은 신기한 듯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노엘만이 아니라 다른 몇 명도 마찬가지인 듯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가볼래?”
“가볼래!”
사도는 노엘을 데리고 돛대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선원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다시 자기 일에 집중했다. 전망대는 갑판보다 훨씬 높았고 보이는 풍경은 역시 바다뿐이었지만 햇빛이 반사되는 각도가 달라서 갑판에서 보는 것과는 달랐다.
“평화롭군. 보통은 이런 평화로운 때에 수중마물이 나오던데.”
“손님, 제발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경험이라서 말이지.”
사도가 진지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다행히 일린에 도착하기까지 심심한 항해만 계속되었을 뿐 마물의 습격은 없었다. 일린에 도착하고 다음 날, 두 사람은 수도로 가는 다른 배를 탔다. 수도로 가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고 배도 상당히 컸다.
“잘생긴 사람이랑 예쁘게 생긴 사람이 많네.”
“돈 많은 상인이나 수도에 사는 부자들, 혹은 귀족들이 배에 탔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수도에는 저런 사람들이 많아?”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 많지.”
사도가 말했다. 사도는 수도에 가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수도 같은 곳에 가면 또 무슨 사건이나 사람과 마주치게 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면 노엘에게 지낼 곳만 마련해준 후에 빨리 수도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카리아를 오랫동안 못 만났군. 나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은 비추러 가야겠지.’
이런저런 생각이 사도의 머릿속을 지나쳤다. 배가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사도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노엘에게 들키지 않게 무표정에 평소 같은 행동을 유지했다. 노엘은 사도와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배는 순조롭게 바다를 달려 수도의 항구에 닿았다. 항구부터 사람이 많고 크고 높은 건물들이 보였다.
“곧 헤론에 닿습니다! 내리실 분들은 준비하십시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배에서 내린 사도는 가장 먼저 무기상을 찾아갔다. 연습용 검을 팔아버리고 검 두 자루를 샀다. 좋은 검이었지만 그만큼 비쌌다. 하지만 사도는 늘 그랬던 것처럼 돈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도는 검 한 자루를 노엘에게 주고 한 자루는 자신의 아공간에 넣었다. 필요한 물과 소금도 사서 아공간에 넣은 후에는 적당한 여관을 찾아 방을 구했다. 여관에 방을 잡은 후에 사도는 노엘을 데리고 수도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수도의 거의 대부분을 돌아보는데 며칠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날도 다른 때처럼 여관에 돌아왔다. 노엘은 평소처럼 잠들었고 사도는 평소처럼 잠든 척하다가 눈을 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사도는 조용히 문을 움직여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는 아직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사도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자리를 떠났지만 사도는 계속 자리를 지켰다. 모두가 자리를 떠나고 사도와 여관 주인인 부부만이 남게 되자 사도는 두 사람을 불렀다.
“주문하실 겁니까?”
“아니,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손님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는 부탁입니다.”
“네? 무슨 부탁입니까?”
“나와 같은 방에서 지내는 여자, 이름이 노엘입니다.”
“그 예쁜 아가씨요?”
“이곳에서 지내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
“이곳에서 지내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사정인지 자세히 말씀을 해주셔야죠.”
“언제까지 노엘이 저를 따라 떠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 당신들에게 노엘을 맡긴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떠나버리면 동생분이 슬퍼할 텐데요.”
“동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빠라고 부르는 걸 제 귀로 분명히 들었는데요?”
“노엘의 작은 마을은 마물들로 인해 망가졌고 가족들은 죽었습니다. 저는 그곳을 지나치다가 생존자인 노엘을 발견했습니다. 5살이었죠. 그래서 그냥 제가 데리고 다니며 키웠습니다. 그래서 저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18세입니다. 더 이상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죠.”
“그래서 떠나겠다는 겁니까?”
“지낼 곳만 있으면 전 더 이상 노엘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검술도 가르쳤으니 자기 몸을 지킬 정도는 됩니다. 노엘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저희 아이라고 생각하죠.”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아이가 없나보네요. 잘 부탁합니다.”
“지금 가는 겁니까?”
“아마 내일 아침이면 헤론에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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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공간이라... 좋은 설정이군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