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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연금술의 계보

- 팔락

"마법의 사용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에너지에 대한 이해이다.
마법이란 것은 결국엔 마나라는 에너지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전환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란 것은 말하자면... 젠장, 또 이런 책이야. 학교 교과서도 아니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새까만 표지의 책을 덮고 여관방 구석에 집어던진다.
쓰레기통에 제대로 들어간 것 같다.

"제대로 학교만 나오면 다 알 이야길 가지고 거창하게 책으로 써내고
쓸데없이 허세 부리긴...
표지부터 수상하게 비싼 냄새가 난다 했더니 결국엔 이 꼴이라니."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버린다.
좀 비싸게 사긴 했지만.. 어디 팔아먹을 수도 없을 테고
결국엔 쓰레기통행이 될 테니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가 보다.

시커먼 하늘은 줄기차게 장대비를 내린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지금까지도 그칠 줄을 모른다.
이런 여름날에는 음식이 상하기 쉬운데다 곰팡이도 피기 쉽다...
벌써 방 어딘가에 생겨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개구리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하늘이 꾸물꾸물한 걸 봐서는 제법 내릴 듯하다.

세인트 존슨.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파릇파릇한 청년인 내 이름이다.
17세에 집을 나와 지금까지 삼 년째.

부모님은 내가 아직 제대로 서지도 못하던 어릴 때에 돌아가셨다.
부모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갈 곳이 없던 나는 그대로 큰아버지 댁에 맡겨지게 되었다.

한 마을의 영주시던 큰아버지.
그분들에게 있어서 나는 단 하나뿐인 혈육.
아들이 없으시던 그분들은 친부모 이상으로 나에게 마음을 써 주셨다.

물론 부족할 것은 없었다.
그대로 살았더라면 나는 아마 영주의 후계자가 되었겠지.

하지만 점점 머리가 굵어지는 시기에 나는 그 친절이 죄스러워졌다.
단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대접받아도 괜찮은 건가.

결국 어느 날 밤 충동적으로 편지 한 장만 남겨 두고 집을 나와 버렸다.
안부는 계속 편도로 전하고는 있지만...
가끔씩 그대로 있었다면 어떨까 하는 망상도 해 본다.
오늘 같은 비 오는 날도... 라고 생각하던 찰나.
뭔가가 반짝이는 듯 하더니 별안간

-콰르릉

...정말로 쉽게 그칠 비는 아닐 것 같다.

시계를 본다. 1시 반이 조금 넘었다.
이제 슬슬 나갈 시간이다.

옷은 대충 챙겨 입었고 우산...은 잭 아저씨한테 빌려야겠다.
방을 나서서 문을 잠그고 한 발짝을 옮긴다.

-끼이이이익

으아아아아... 이 소리 진짜 싫다.. 칠판에 대고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고주파음
이럴 때는 나무마루가 진짜 싫다.

-쿵 쿵 쿵

계단을 내려오자, 카운터에는 잭 아저씨가 헤드폰을 끼고
비를 바라보며 음악을 듣고 계신다... 괜히 방해할 수는 없지.
옆에 있는 우산들 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들고... 저 문 앞으로 나서서...


"아저씨 우산 좀 빌릴게요!"


대답을 들을 시간은 없다.

아저씨의 고함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달린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빌리는 거다. 빌리는 거! Borrow!
돌려주는 게 전제가 되어 있으니 문제는 없다.

-탁 탁 탁
이 마을은 길 자체가 좁고 꼬불꼬불하다.
왕국이 정립되기 전, 산적 같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라서 길 외우기가 힘든 건 아니지만,
처음 오는 사람은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길을 잃게 된다.
길을 한 블록만 잘못 들면 같은 곳을 빙빙 돌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가면 되지만.

"여기서 왼쪽으로 다섯.."

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여행을 하던 중
네 달 전에 이 작은 마을 하네만에 흘러 들어왔다.
이곳은 작긴 하지만 대대로 가업을 잇고 있는 인쇄공들이 살아가는 마을.
소수 권수로 출판되었던 희귀본들을 볼 기회가 상당히 많다.
이 책들의 매력에 이끌린 나는 여기에 벌써 네 달째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네 달씩이나 머무를 이유는 상당히 부족하겠지.

"여기다."

-끼이익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선다.

오래 된 종이 냄새.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냄새는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는다.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간다.
희미하게 전구불이 비치는 방.

방문을 열자 모자를 쓴 60대 정도의 약간 몸집이 큰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평범한 흰색 티셔츠에 평범한 반바지.
사람이 온 것을 느끼고 내 쪽을 돌아본다.

"...존슨이냐. 문은 닫지 말거라. 오늘 같은 날엔 비를 즐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차라도 한 잔 마실래?"

"조금 늦었네요..."

"어차피 정확하게 정한 시간은 아니지. 결국엔 여기에 올 거였잖냐. 어때, 차는 뭘로?"

"맨날 마시는 거요."

이 마을은 수공업으로 고품질의 책을 소량으로 만드는 마을.
뒤집어 말하면, 그런 책들의 출판을 의뢰하러 오는 사람들도 여기에 온다는 이야기다.
지금 내 앞에서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는 빌 선생님도 그런 분들 중 하나다.
빌 선생님은 마법의 정수라 불리어지는 연금술을 처음으로 창안하신 분이다.
연금술은 당시의 생각으로서는 전혀 발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마법이기에,
그 창안자인 선생님께서는 곧잘 천재의 대명사로 불리곤 하신다.
지금은 몸을 숨기고 이 시골 마을에 내려와 살고 계신다.
왕국에 의해 억눌린 지식인.
자신이 알려지는 걸 꺼리는 현자.
이런 분들이 하네만에는 알게 모르게 많이 계신다.

열린 창문으로 조금씩 빗방울이 튀긴다.
기분이 좋....았다. 빗방울이 눈에 튀기 전까지는.

"아으!"

"왜 그러냐?"

"아... 아무 것도 아니예요."


"날씨가 참 좋지..."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요?"

"나는 맑은 날보다는 비 오는 날을 훨씬 좋아한단다.
비가 모든 것을 씻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내리지도 않는 것 같이 찔끔찔끔 내리는 건 맑은 날보다도 싫어하지만."

"예... 그래서 오늘은 왜 부르셨어요?"

"그래. 바로 이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선생님은 두툼한 책 한 권을 꺼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무슨 책인데요?"
"네가 직접 보거라."

책을 받아들고 펴 본다.
맨 앞장에 책 제목이 써 있다..

"...이건..."

"내가 쓴 책이지만 나조차도 구하기가 힘들어서 말이지.
다행히도 이 책의 출판을 부탁했던 제스 씨가 아직 살아 계셨거든.
바로 한 권 뽑아 달라고 했지. 덕분에 내 옛날 생각도 나고.. 그땐 아직 젊었지...."

-콰르릉

천둥이 쳤다.

"-."

얼굴을 찌푸리며 내뱉는 한 마디.
천둥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무겁게 짓눌러 온다.

그리고 나는 손에 들린 책으로 눈을 옮겼다.

연금술개론.
빌 선생님이 젊으실 적 쓰신 책이다.
연금술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와 기초 사용법 등을 기록하신 책이다.

36년 전.
연금술을 사용하는 자들이 모두 왕가에 의해 신변이 구속되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놔 두어서는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처리된 것이리라.
지금에 와서는 '연금술사 사냥' 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사건 이래로, 세상에 돌고 있는 연금술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이 시정잡배가 쓴 가짜들.

나는 연금술의 진실을 담은 단 하나의 책을 찾고 있었다.

연금술. 마나를 이용한 원소간의 변환.
원소학에서 말하는 이론에 따르면 원소간의 변환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게다가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하는 데에는 단계적 과정을 거쳐야 하는 데다,
그 변화에서 일부의 질량이 손실되며 에너지로 변하게 되므로
실질적으로 원소의 변환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졌다.

그 때 등장한 것이 연금술이다.

연금술은 손실되는 질량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마나로 대체하여
원소를 다른 원소로 변환시킬 수 있게 하는 마법.

지금 시대에 연금술의 흔적을 뒤쫒는 사람들은 단 두 부류이다.

원소의 변환을 통해 떼부자가 되려는 욕심 많은 돼지나,
원소의 변환을 통해 떼부자가 되려는 욕심 많은 마법사.

하지만 나는 떼부자가 되는 건 상관 없었다.

내가 줄곧 이 연금술개론을 찾아 왔던 이유는 단 하나.

흥미다. 순수한 탐구심.

그것만으로 지금까지 줄곧 이 책을 찾아 온 것이다.

나는 궁금했던 것이다.

왕국이 움직여서 배포를 막을 정도의 마법이란 어떤 것인가.
돈에만 눈이 팔린 돼지들에게 그런 귀중한 책을 넘겨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찾아 온 지난 2년.
이걸로 끝이다.

황홀하다.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다.
가슴 속이 벅차오른다.

"딱히 감사의 말은 안 해도 된다. 네 얼굴이 모든 걸 보여주니까.
젊다는 건 좋은 거지..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야."

정적이 흐른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정말로 거기서 끝나 버리니까.
너는 아직 젊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거라.
이게 정말 이걸로 끝나는 것인지. 더 깊이 들어가면 무엇이 있는지.
세계는 생겨난 이래로 쭉 그런 식으로 발전을 이루어 왔다."

책을 바라보던 눈을 간신히 떼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기억하거라, 존슨.
모든 것은 의문에서 시작한단다.
그 책은 내가 마나를 아직 느낄 수 있던 때 알아낸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너라면.. 거기서 더 깊이.. 내가 도달하지 못했던 곳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슬픈 눈을 하고 계신다.
푸른 눈동자 저 편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교차.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는 기쁨.
과거의 소실을 떠올리는 슬픔.
나까지 복잡한 기분이 된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은 걸까.
...잠깐.

"마나를 아직 느낄 수 있었다니.. 그럼 지금은.."

"그게 내가 지금 마법을 쓸 수 없는 이유지.. 이제야 말하게 되는구나."

빌 선생님이 모자를 벗었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져 있는 사이에
무언가로 태워진 듯한 검붉은 피부가 있었다.

"나는 지금 뇌에서 마나를 느끼는 부분이 없다."

모르겠어.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은 걸까.

"왕국의 연금술사 사냥 때 가장 먼저 끌려가 태워졌지.
명성이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었어.
명성이 높으면 내가 하는 행동이 대중에 노출되기 쉽지..
매일 한 사람씩 죽어 나갔어. 정말 끔찍했다."

차를 한 잔 마신다.

"하루하루가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연금술사는 대부분 나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하루에 한 사람씩...
똑바로 마음을 먹지 않으면 미쳐 버렸겠지. 실제로 미쳐 버린 자들도 꽤 있었다.
그런 나를 감옥에서 꺼내 여기까지 데려와 준 건
내 절친한 친구였던 메르엘이었다."

"메르엘.. 과학이란 이론을 정립하신 분.. 하지만 선생님의 이론을 베껴서 문제가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연금술사에 대한 탄압 때 사라진 게 아닌가요?"

"그래.. 처음 하나는 맞구나. 지금 바로 네 뒤에 있어."

"어?!"

뒤를 돌아다보자, 키가 크고 안경을 쓴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맹수와 같은 검은색 눈에서는 대지 위에 선 자존심이 흘러나온다.
긴 갈색의 로브를 걸치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입어서 득이 될 게 없을 것 같다.

"벌써 36년이나 지난 일이지. 의자 어디 없나?"

"저기 구석에 있네."

메르엘 씨는 의자를 가져다 빌 선생님 옆에 앉았다.

"네가 그 세인트 존슨이냐."

"예..."

당장 분위기에 압도되어 버렸다.
엄청난 무게로 내리누른다...
이런 사람이.. 정말로 다른 사람의 이론을 베낄 사람일까?

"세인트라.. 역시. 이 녀석이 사람을 그냥 골라잡을 리가 없지."

"...?"

아무래도 내 성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저기.."

순간, 칠흑과 같은 눈빛이 날 꿰뚫는다.
그와 동시에 내 안에서 한 마디 말이 울린다.
지금 물었다가는 험한 꼴을 당한다고.
그야말로 맹수 앞에 선 여우 꼴이다..

"뭐냐?"

"아.. 아뇨.."

빌 선생님에게 구원을 요청하듯 시선을 보낸다.

"저기 그.. 저 돌아가도 되나요 이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본다...

"음.. 뭐 그.."

"안 돼."

윽.
빌 선생님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묵직한 굳히기 한 마디로 다시금 나를 짓누른다.
아무래도 탈출은 글러먹은 것 같다...
얌전하게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다.

"너, 마법은 어느 정도 하나?"

"예?"

"네가 할 수 있는 마법 말이야."

"음 그.. 소환술 말고는 실력은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소환술은 웬지.. 그 뭐라고 할까 좀 그래요."

"흥."

당장에 콧방귀.
무시당했다...

"과학에 대해선 좀 아나?"

이..이 질문은.. 설마..

"학교에서 배운 정도만요."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지?"

"상급학교...인데요."

"흠."

아까 고개를 돌릴 때와 똑같은 소리를 내더니
날 똑바로 응시하면서 맹수와 같은 그 눈으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시선이 지나갈 때마다 뭔가가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다...

"전기에 대해 알고 있나?"

... 내가 생각하던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다행이군.

"....그게 뭐죠?"

"학교에서 배운 것들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말해 봐."

방금 한 말 취소.
예감 적중. 예지력이 상승했다. 그것보다 이 동문서답은 뭐지.

"음.. 그러니까.. 역학이랑 열역학하고 원소설이랑... 그 정도요."

"너는 연금술을 익히고자 해서 그 책을 찾고 있던 거겠지."

"네..."

질문이 여기서 저기로 왔다갔다하네...

"연금술이란 마나를 사용한 원소 구조의 변화다.
연금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원소설에 관해서 확실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
네가 연금술을 사용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나는 그걸 실험해 보고자 한다."

... 그나마 다행이다.
원소설만큼은 연금술을 위해서 지난 2년간 연구해 왔으니 어려울 것은 없을 것 같다.

"이쪽으로 와라, 세인트. 그리고.."

손을 뻗더니 순식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책을 낚아챘다.

"이 녀석이 통과하기 전까지 이 책은 자네가 맡아 주게. 곧 돌아옴세."

그리곤 책을 빌 선생님께 던졌다.
빌 선생님은 멋들어지게 책을 받아들고는 탁자 위에 놓았다.

"뭐, 크게 걱정 마라. 네가 지금까지 배워 온 것들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면 괜찮을 거다."

그리고 빌 선생님은 씩 웃었다.

"그럼 가 볼까."

메르엘 씨의 손에 이끌려,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끼이익 끼이익

계단은 오래된 나무 계단이라, 심하게 삐걱거렸다.
비가 와서 습한 탓으로 더 소리가 심하게 나는 듯 하다.

"그래서 뭘 시험하는데요?"

"와 보면 알아."

무게감 섞인 한 마디에 나는 또 찌그러져야 했다.

- 끼이익

"들어가라."

방에 들어갔다.

탁자 위에 널부러진 금속선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자석들.
책상 위에는 원고지들이 산만하게 놓여 있다.
연필꽂이에는 샤프 펜슬이 대여섯 자루 꽂혀 있다.

-쾅

메르엘 씨가 문을 닫고 들어온다.

"거기 침대에 적당히 앉아라."

시키는 대로 적당히 앉았다.

"이제.. 뭘 하면 되죠?"
"너에게 질문을 하겠다."

으.. 드디어 시작인가.
과연 내가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있을까... 혹시 이상한 문제가 나오면 어쩌지...

"연금술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봐라."

"...네?"

당황했다.
원소에 관한 질문을 하는게 아니었구나... 그럼 뭐야 아까 그 떡밥은.

"음..."

"빨리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돼."

"음... 일단... 원소를 다른 원소로 바꿀 수 있고..."

"그리고?"

"음...."

분명 뭔가 더 있을 거다.
연금술로 할 수 있는 일...

"음....어... 잠깐만요. 음...."

생각을 하자.
뭔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다.
메르엘 씨는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

"잘 생각해 봐라. 난 차라도 한 잔 내오마."

어라. 이 분, 의외로 사람을 배려하는 면도 있으시네.
메르엘 씨가 차를 타러 나간 사이.
나의 생각은 질문의 답을 찾아서 기억 속을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답에 도달했다.

"기다렸지."

메르엘 씨가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은은한 향기가 풍긴다.

"자, 한 잔 마시거라. 해외에서 들여온 귀한 차다."

"잘 마실게요. 그리고, 저 그 문제의 답을 알았어요."

"뭐?"

"답을 찾았다고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뭔가 더러운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답을 말하려고 하면 이런 취급을 받는구나.

"그래서?"

"그... 원소를 바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뭐?"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맹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다시 말해 봐라."

"연금술로 할 수 있는 일은 원소를 바꾸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근거는 뭐냐? 찍은 게 아니라면 근거가 있겠지?"

정답인 모양이다. 애초에 확실한 답이었지만.

"연금술은 한 원소를 다른 원소로 바꾸는 마법이기 때문입니다."

"흥."

콧방귀를 뀌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신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물으면 한 번만 반론을 해도 흔들리고 말지.
근거가 없기 때문이야.
찍어서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다시 찍으면 그만이란 생각.."

갑자기 일어서더니, 내 찻잔을 들고 다시 나간다... 어?

"잠깐만요! 그거 제 차..."

"이 차엔 강력한 수면제가 들어 있었다."

"헉.."

"이 차를 마시기 전까지 대답을 하거나
이 차에 수면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것.
이 둘 중에서 한 가지도 못 한다면, 널 재워서 여기 놔 두고
짐을 챙겨 거처를 옮길 생각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연금술은 그만큼 위험한 것이라는 말이다."

... 위험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나를 막을 순 없다.
나도 이젠 20세다.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

"하지.."

"말을 끝까지 들어라."

다시금 나를 바라보는 맹수의 새까만 눈...
내 말문을 막는 건 여전하지만, 지금은 뭔가 다르다.
자식을 바라보는 눈.
연민.
메르엘 씨의 눈은 그것이었다.

"내려가자. 내려가서 이야기하마."

-끼익

아직도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이제 슬슬 그칠 때도 되었을 텐데..
시계는 2시가 약간 넘어가고 있다.

"저기... 메르엘 씨."

"왜."

"메르엘 씨도... 연금술사 사냥 때..."

"...나는 연금술사가 아니다.
당연히 사냥 당하지도 않았지."

"...."

"친구가 잡혀가는 걸 보면서 혼자 잘 살기보다는
이렇게 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엇인지 모를 느낌을 나에게 전달해 준다.

-끼익

메르엘 씨가 앞서서 빌 아저씨의 방문을 열어젖힌다.

"돌아왔네."

"존슨은?"

"내 뒤에. 무사히 통과한 것 같군."

자기가 통과시켜 놓고...

"자, 들어가라. 책을 받고 설명을 들은 다음 다시 위로 올라와라.
난 준비를 해 놓고 있을 테니."

메르엘 씨는 나를 떠밀듯 방 안으로 밀치고는 문을 닫고 다시 위로 올라간다.

"...어떻게 잘 해낸 모양이구나. 축하한다."

"메르엘 씨는... 젊을 때 어떤 분이셨어요?"

본인의 입으로 들을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그렇다면 주변인의 입으로 듣는 수밖에 없겠지...

"...그렇구나. 역시 너도 느낀 거구나."

"말씀해 주세요."

"그래... 내가 메르엘을 처음 본 것은 도서관에서였다."

아직 남아있는 차를 집어들어 마신다.

"왕립 도서관. 학자라면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정보의 장이었지.
매일 마도학자들의 토론이 열리곤 했단다.
하지만 그 녀석은 언제나 혼자였어. 마법을 쓰지 못해서였지.
할 수 있는 게 책으로 보고 입으로 지껄이는 것뿐인 자라고 모두가 손가락질했어.

하지만 나는 역으로 흥미가 생겼단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가 보는 마법이란 어떤 것인가.

처음 이야기했을 때, 메르엘은 나에게 원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단다.
그리고 이 원소설이 마법과 융합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도..

지금까지 어디서도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였지.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했고.
그는 천재였던 거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나는 모두로부터 칭송받는 천재였지.
메르엘은 칭송받지 못하는 천재였던 거야."

시대에 영합하는 천재는 누구에게나 칭송받지만
시대에 영합하지 못한 천재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그랬던 거다. 메르엘 씨도..

"우리는 '동류' 였기 때문에 서로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메르엘 또한 어느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었지.

메르엘이 이론을 발표했을 때,
먼저 발표했던 내 연금술론에 포함된 원소설 때문에 물의를 빚었던 적이 있었지.

그 때 메르엘은 아무 반론 없이 지탄을 받기만 했어.
날 생각해서였지.

그 때 그가 나에게 했던 말... '난 자네만 있다면 어떤 모함을 받아도 상관 없네.'

나는 아직 젊었어. 그래서 눈 앞의 명예를 좆아서 해명을 하지 않았지.
게다가 도둑놈처럼 그 이론을 책으로까지 묶었다.

지금까지도 그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란다.

만약 내가 메르엘을 만나지 못했다면, 사냥 때에 목숨을 건졌다고 해도
지금처럼 살 순 없었겠지. 분명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 때문에 미쳐 버렸을 거야.

나는 몰락했어.
마나를 잃자 모든 것을 잃었지.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메르엘이 나에게 가르쳐 준 과학뿐이야.

하지만 메르엘은 처음부터 마나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모두가 마나를 잃은 사냥 전과 달라진 게 없단다.

메르엘은 내가 몰락한 지금, 이 왕국에서 최고의 천재야."

"....."

말을 할 수가 없다.
단지 바닥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 잔 마시거라."

찻잔을 집어 미지근해진 차 한 잔을 원샷한다.
찻잔을 놓자, 빌 선생님이 연금술개론을 꺼냈다.
그리고는 첫 표지를 넘긴다.

"보거라."

-불운의 천재 메르엘의 이름으로
친애하는 세인트 존슨에게 바침

"불운의 천재 메르엘의 이름으로
친애하는 세인트 존슨에게 바침..."

"하하하... 거기도 맞지만, 정말로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더 아래에 있단다."

연금술개론

빌 헤링턴 / 메르엘 기프틴 저

"처음 펴낼 때에는 내 이름만이 적혀 있었단다."

"그러면..."

"최소한... 마지막 책에만이라도 그의 결백을 증명해 주고 싶었단다."

선생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죄스러운 사람이야.
친구를 버리고 명예를 좆는다는, 인간으로서 최악의 짓을 저질렀지.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돼..
명예를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친구는 절대 버리지 말거라.
결국 마지막에 너의 곁에 남는 것은 너의 명예를 좆는 사람이 아닌, 너의 친구다."

"...."

나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일어설 수도 없었다.

인생을 연구에만 바쳐온 천재.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는 외롭다.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동류'마저 사라진 천재.

나는 천재는 아니지만, 메르엘 씨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구나. 슬슬 올라가 보거라.
설명은 특별히 안 해 줘도 너 정도라면 다 이해할 거다."

"네.."

방문을 열고 나갔다.

두 발자국을 걷자, 방 안에서 빌 선생님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아프다.

-끼익

메르엘 씨의 방문을 열었다.

"...이제 왔냐."

"그런데... 준비는요? 아까 뭔갈 준비하신다고..."

"존슨, 너는 너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갑자기 질문. 이 사람은 안심할 수가 없다...

"어... 그러니까 평범한 마법사.."

"넌 평범하지 않아."

똑바로 나를 바라보는 맹수의 눈.

"네 몸 속에는 세인트 고든이 가졌던 천재의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것 뿐이다...
...네 아버지의 이야기다."

"...!"

20년 동안 모르고 살아왔던 아버지의 이야기.
누구에게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들어 보겠느냐?"

그 이야기가,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려 한다.

"...네."

"하긴.. 안 물어봐도 될 뻔 했구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네 아버지는 자신을 그다지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비난받아 왔고, 빌은 칭송을 받아 왔지만
고든은 어느 쪽도 아니었지. 그저 연구만을 계속했어.

나와 똑같았지. 비난만 받지 않을 뿐..
그 녀석이 연구하던 건 마나의 압축.
마나의 압축을 더욱 농밀하게 할 수 있게 되면 소수 선택받은 자의 특권이던
고위계층 마법을 엘릭서 없이도 누구나 쓸 수 있게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지.

그 녀석이 꿈꾸던 건, 범인이 범접할 수 없는 최고봉의 재능을
노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거였어.
언제나 자신이 평범하다고 믿었고, 언제나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천재였어.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지.
결국 그는 사냥을 당할 때까지 자신이 천재란 걸 알아채지 못했단다.
하던 연구도 끝내지 못했어. 끝까지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못한 거지..

너 때문에 여러 모로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빌도, 나도...
과학도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이라고 하는 거겠지..."

나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자신도 추억에 젖어 버린 것일까.
메르엘 씨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자신을 믿어라. 자신을 믿는 힘은 어떤 상황이라도 너를 떠받치는 힘이 되니까.
고든에게 못다한 말, 오늘 너에게 하게 되는구나.."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메르엘 씨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어엇?! 왜 이러세요?"

"너에게 줄 것이 있다."

메르엘 씨는 책상 서랍을 열더니 작은 반지를 꺼냈다.

군데군데 벗겨진 황금 도금들 사이에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만 같은, 바다의 심연처럼 푸르른 보석.

"이건 날 인정해 주었던 또 하나의 천재인 세인트 고든이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다.
가능한 한 마나를 응축해서 결정으로 굳힌 거라더구나."

아버지의 유품.

"사냥 한 달 전, 그 녀석이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 나에게 준 선물이다.
아까 네가 아래에 있을 때 이걸 찾았었지.
받고도 어디에 뒀는지 잘 기억도 못 하는 나보다는
네가 가지고 있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지를 받아든다.
손가락에 끼워 본다...

"...크네요..."

"그 녀석의 손은 평범한 사람보다 컸었지.
나에게 주는 선물이면서, 자기 손에 맞춰 버렸던 거야..."

엄지손가락에 끼워도 겨우 맞을까 말까 하는 반지.
반지의 옆에 작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영원한 나의 벗 메르엘에게

금 도금이 벗겨진 글자에서 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 그만 가 봐도 좋다."

"..끝까지 사람 대하는 법이 서투르시네요."

"후후.."

처음으로 웃었다.
소탈하면서도 꾸밈없는 웃음.
절대로 웃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 웃음소리는 한없이 순수했다.

그러나 그 순수한 웃음도 잠시였다.

"... 잘 가거라."

신호였다.
마음 속에 응어리진 채로 굳어 버린, 옛 친구의 기억의 실타래는 여기서 끝이라고.

그 순간.
나는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말 못할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그래.. 그것은 '동류' 들과의 공명.
아버지와 '동류' 의 사람들 속에서, 어딘지 모를 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벌컥

메르엘 씨의 방에서 나와 시계를 보자 2시 40분이었다.
그대로 나는 책 한 권을 들고 집을 나왔다.

비는 이제 그친 것 같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쳐 온다.

그래, 내일 이 마을에서 나가자.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 젊다.

오늘 이 집에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

두 분이 못다 이룬 연금술.
내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연구.

나는 이 두 가지를 내 손으로 끝낼 것이다.

앞으로의 갈 길은 멀고 아직 나는 젊다.

모든 것의 끝.. 의문으로부터 시작해서 깨달음으로 끝나는 길.
지금 그 길의 첫걸음인 의문과 그 대답이 내 마음 속에 떠올랐다.

질문. 나는 누구인가?

대답. 세인트 존슨. '동류' 들이 처음으로 찾아낸 길의 끝을 찾아낼 사람!

자, 새로운 길을 찾은 기념으로 크게 한번 외치고 가자!

"이제부터가 시작이다아아아아아!"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방금 내 목소리를 듣고
저기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기세로 쫓아오는 잭 아저씨부터 따돌려야겠다.

자, 달려 나가자!



-END














원래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썼다면 아마 책 두 권은 써야 했을 겁니다.

추천인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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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레벨:2]권권 2009.08.31. 00:52
와..... 엄청 기네요 졸라 고생하신듯 ㅋ
[레벨:0] 2009.08.31. 01:06
라이신노 케이후
[레벨:2]예비과정 2009.08.31. 20:28
책 두권다써보지... 기간은 충분히 줄게 ㅋㅋㅋ
[레벨:1]민수사이더 2009.08.31. 21:25
책 두권 분량 !_! 분량이 다 나오면 한번 담아서 쭈욱 연결해서 보구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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