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사밀담(呪術士密談) [ 직업을 바꿔봅시다. ](1)
- 요할로우
- 2064
- 2
" 한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나는 쌓던 벽돌을 놓고 뒤로 돌아 느긋하게 앉아서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봄바람에 절로 잠이 쏟아졌는지 연신 하품을 하던 노인은 한 박자 늦게 나에게 시선을 마주했다.
" 제자의 질문에는 대답해주는 것이 스승의 도리지. "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괜히 샛길로 샐까봐 그대로 말을 이었다.
" 왜 스승님이 부신 성벽을 제가 수리해야 하는 건지요? "
" 자네 혹시 '제자의 잘못은 스승의 책임'이라는 말을 알고 있나? "
그렇게 말하고 '절대 내가 고치지 않겠다.'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 그렇다고 '스승의 잘못을 제자가 감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
" 아니지.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지. 자네의 경우는 '사회생활의 경험'일세. "
또, 또 딴 길로 샜어! 빌어먹을 영감탱이! 나는 실룩거리는 눈썹과 함께 으득! 어금니를 깨물며 반론했다.
" 사회경험은 업무를 피해 현학관 도서실 구석에 숨어있는 어느 어르신보다는 많다고 생각합, 우악! "
노인은 손가락을 빙글 돌리더니 허공에 생긴 작은 뢰진주를 나에게 쏘았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파직거리는 번개 구슬을 피했고 덕분에 반쯤 쌓아올렸던 벽돌이 무너지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구석이라니, 자네는 이 대마신(大魔神) 해두에게 어울리지 않는 소릴 하는군. "
내 말의 요지를 다른데서 파악하고 있구만.
해두. 지금 내 앞에서 한가롭게 앉아있는 노인의 이름이다. 직위는 자신이 스스로 말한 것과 같이 대마신. 뻔뻔하게 보이겠지만 사실이다. 나의 스승인 해두는 고구려의 몇 안 되는 마신 중에서도 최고로 높은, 모든 주술사들의 동경의 대상인 대마신이다. 지금 이렇게 보면 그냥 심술난 영감탱이랑 다를 바가 없지만 사실은 사실이니 인정해야지. 에휴.
" 그럼 좀 도와주시기라도 하시죠? "
" 자업자득일세. 트레바리군. "
이어 해두는 " 구석이라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나지 않았을 걸세. "라고 꼬리를 달며 곱지도 않은 턱수염을 매만졌다.
" 해두님! "
저 멀리서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병사 한 명이 이리로 달려왔다. 느긋하게 앉아 있던 해두는 윽! 화들짝 놀라더니 벌떡 일어섰다. 당연하지. 아침에만 해도 집무실에 결재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다며 그냥 나와버렸으니 말이다. 이어 해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한 번 뢰진주를 쏘았다. 워낙 갑작스런 공격에 나는 마력방패를 만들지도 못하고 또 피하게 되었다. 뒤에서 와르르……. 성벽의 구멍이 가로로 더 넓어졌다.
" 그리고 나는 도서실에 숨어있지 않았네. 업무로 인해 부족해진 수면을 보충하러 간 거지. "
정말로 뒤끝이 무지하게 심한 빌어먹을 영감탱이다. 그렇게 해두는 병사를 피해 벌써 저만치 멀어졌다. 병사는 나를 한 번 훑어보고는 곧 바로 해두를 뒤쫓았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구멍난 성벽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감상을 원하는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해가 머리 위로 옮겨왔을 쯤, 나는 드디어 성벽의 모든 수리를 마쳤다. 우와! 끝이 보이지 않던 성벽 수리가 끝났다! 우두둑! 뻐근했던 허리에서 나는 소리에 나는 바로 허리를 부여잡으며 골골댔다. 역시 주술사는 체력이 부족하단 말이야.
성벽을 수리하는데 썼던 장비를 챙겨 왕궁 창고에 반납한 뒤 지금쯤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의자에 묶여 결재를 하고 있을 해두를 떠올리며 그가 있는 집무실로 발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대마신 해두는 칭호와 어울리지 않게 의자에 꽁꽁 묶인채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진짜 포승줄에 허리가 묶여 있었다.-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결재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쌤통이다!
" 마치 쌤통이다~! 라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군. "
내 표정이 너무 진솔했나? 해두는 눈썹을 실룩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우회적으로 그를 놀렸다.
" 현사밖에 되지 않는 제가 어찌 대마신 해두님을 놀리겠사옵니까? "
" 현사? 웃기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
그의 말이 맞다. 현사라니, 나조차도 코웃음이 절로 난다. 대마신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현사같은 하급 직급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직급이 높지만 어쩌리오! 사정이 있어서 마력을 감추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저 눈물이 나올 뿐이다.
" 그래서 결재는 다 되어 가십니까? "
" 이미 다 끝내고 혹시나 해서 확인하는 중이지. "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선서명 후확인이라니. 정말 고구려의 모든 주술사들이 보면 참으로 실망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 아, 트레바리. 내 부탁 좀 들어주겠나? "
" 들어주지 않으면 어차피 때리실 거잖습니까? "
맞는 말이군. 중얼거리면서 낄낄 거리는 해두. 그 웃음소리가 정말 해악하기 짝이 없다. 해두가 대답했다.
" 밀짚모자 좀 구해다 주게. "
엥? 갑자기 웬 밀짚모자? 라고 그대로 내뱉으면 번개로 때릴 것 같아서 한 번 마음을 바로잡고 차분하게 되물었다.
" 밀짚모자는 어디에 쓰시려고? "
" 소풍이나 갈까 생각중이네. "
" 죄송하지만 스승님 휴가는 이미 다 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 이게 바로 권력 남용이지. "
정말로 당치도 않는 말을 태연하게 말씀하시는군. 나는 그것보다 더 밀짚모자의 재료를 곰곰히 생각하며 윽! 소스라쳤다. 내 반응을 보고 바로 파악했는지 해두는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 요즘 쥐굴이 장난아니게 더럽다는데 대마신인 이 해두가 갈 수는 없잖은가? "
" 그렇게 따지면 저도 쥐굴을 졸업한지 십 년은 더 흘렀습니다만? "
대개 내가 이렇게 말하면 해두로부터 번개가 날아오기 십상인데 이상하게 뭔가 날아오지 않았다. 가만, 그러고보니 저 포승줄……, 대신선 진선님의 마력이 느껴지잖아?
" 망할! 진선이 그 할망구한테 걸리지만 않았어도 네 놈한테 극진뢰격참주를 먹여줬을텐데! "
정말 고개 숙여 감사합니다, 진선님.
" 그럼 밀짚모자의 재료인 쪽꽃 채집은 병사들에게 시킬테니 스승님께서는……!? "
해두의 뒤로 작은 그림자가 슉! 지나갔다. 워낙 한순간이어서 누군인지는 보지 못했으나 사람이 분명했다. 말도 안 돼! 여긴 고구려 국내성 중앙궁의 대마신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해두의 집무실이라고!
" 방금 뭔가? 제자 트레바리군? "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는 뻔뻔하게 자신을 대마신이라고 부르면서도 사태 파악이 되지 않나 보다. 나는 영혼마령봉을 꽉 움켜쥐고 그림자가 넘어간 쪽으로 뛰어갔다.
" 이봐! 이것좀 풀어달라고! "
해두의 쓸데없는 말을 곱게 무시하고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영혼마령봉에 마력을 불어넣어 타척보 주문을 읊었다. 눈이 좋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이라면 투명이나 잠행, 혹은 은신 셋 중에 하나다!
" 윽! "
정확했다. 복도 모퉁이에서 열쇠꾸러미를 가지고 막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였다. 잠깐만. 여긴 주술사와 도사 계급이 지내는 비격수궁이라서 도적인 격수가 들어오지는 못할텐데? 게다가 열쇠꾸러미라고? 모퉁이를 돌아 잠깐 뒤를 보니 경비를 돌고 있던 일반 병사 두 명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호오~ 무단 침입에 규법을 어겼어? 나는 얼마전에 너무 심심해서 읽었던 고구려법전의 내용을 떠올리며 초상비령술로 도적의 뒤를 바짝 추격했다.
초상비령술. 평민들과 다르게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마법 중에 하나이다. 지금은 다섯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마법이라고 부르기가 좀 그렇지만 넓은 곳이나 지금처럼 빠른 걸음이 필요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마법이다.
" 잡았다! "
도적은 민첩성이 뛰어난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당황해서인지 초상비령술을 쓰지 않았고 얼마 가지 못해 나에게 붙잡혔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내가 주술사이기 때문에 완력은 분명 이 녀석이 더 셀텐데 팔을 붙잡았는데도 내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악악! 아프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정말로 나에게 붙잡힌 팔이 아팠는지 도적은 풀썩 주저앉으며 나를 돌아봤다.
" 여자─!? "
머리를 땋은 여도적은 글썽거리는 눈물로 내게 말했다.
" 주술사가 되고 싶어요. "
" 헐렝? "
" 그러니까……, 자객 직업을 버리고 주술사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 "
마비 마법을 걸 필요도 없이 완력으로 여도적을 해두의 집무실로 데려온 나는 마침 대신선 진선님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진선님은 외출 때가 아니면 보통 금통옷을 입고 계시는데 편하다는 이유로 금비단을 제단한 옷을 입고 계시다니. 어느 빌어먹을 노인네하고는 위엄이 남달랐다.
" 허허~ 처자는 이름이 뭐지? "
" 희, 희랭이라고 합니다. "
진선의 용서로 포승줄에서 풀려나 그 포승줄에 묶인 희랭을 보며 입꼬리가 귀에 걸린 해두가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며 헤벌쭉 웃고 있었다.
" 정신사납게 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
빡! 해두의 머리를 한 치 망설임 없이 후려치는 진선. 해두는 눈알이 튀어나올듯이 소스라치며 진선에게 주름이 잔뜩 진 얼굴을 들이댔다.
" 이, 이 노망난 할망구가! 밖에 나가서 그래봐라! 어디 젊은 계집애가 어르신을 때리냐고, 으갸악! "
진선의 발길질과 동시에 머리를 한 번 더 얻어맞는 해두. 해두의 말대로 대신선 진선의 모습은 젊은 여자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피부가 곱고 아름다웠다. 듣기로는 몸 속에 마력을 일정 순환시켜 젊었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마법이라는데 예전에 해두가 계속 할망구, 할망구해서 물어보았더니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다.
쓰러진 채로 몇 번 더 얻어맞은 해두가 입을 다물자 진선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 왜 자객까지 승급하고 나서 주술사로 전향하고 싶은지 그 이유를 물어도 될까? "
찰나 전까지만해도 인정사정없이 해두를 짓밟다가 나긋하게 고운 음색으로 말을 건네는 진선의 모습이 조금 무서워보였는지 희랭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하긴, 나도 처음에 진선이 해두와 내게 대하는 모습을 봤을 때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꽤 고민을 하긴 했지.
" 저의 어머니는 과부입니다. 그래서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자 직파(職波)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직파를 관리하시는 분께 여쭤보니 도적 직업은 단독 임무가 많아 그 보수를 고스란히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도적으로 직업을 택했구요. "
그녀의 말대로다. 도적은 오직제도(五職制度)의 다섯 직업 중 단독 임무가 가장 많고, 또 단독이니만큼 동행 임무에 비해 보수가 그대로 임무 수행자에게 돌아온다. 물론 보수의 일부분은 세금 같은 식으로 국내성으로 들어오지만 이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자.
" 그런데 자객까지 하셨으면서 왜 지금에서야 주술사로 다시 시작하고 싶으신 거죠? "
자객. 도적 직업이 팔괘와 더불어 그간 쌓아올린 경험을 토대로 승급을 하면 가장 먼저 얻게 되는 칭호이다. 그 말은 즉 그녀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내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내 물음에 희랭은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 푸하핫! 망할 제자 놈! 여자를 울리다니! 이 천하의 나쁜, 우억……! "
해두는 엎어진 채로 나를 가리키며 게걸스럽게 웃다가 진선에게 명치를 걷어채였다. 윽……, 저거 굉장히 아플 것 같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니 나는 지금 그냥 물어봤을 뿐이라고. 해코지 같은 건 하지 않았단 말이다.
" 직파 사람들은 도적은 항상 모든 이들의 어두운 면에서 생활해야 한다면서 장도 못 보게 하고, 같은 직업 선배님들은 도적이 뭐 그렇게 착해 빠졌냐며 신고식으로 봉급을 빼앗아가고, 거리의 사람들은 도적이 왜 당당하게 고구려 직업에 속해있냐며 손가락질 해대고, 임무도 훔쳐오는 임무가 많은데 저는 겁나서 못했고……, 보수는 당연히 못 받았고, 훈련 중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면서 뱀을 잡아먹으라고 하고……, 으앙! 저 도적하기 싫어요! "
세상의 모든 도적 계열 분들이시여. 부디 이 아가씨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냥 넘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희랭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토해내며 대성통곡하듯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좀 끼여들자면 나도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시점에서 거리낌없이 뱀을 잡아먹어 본 적이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말하면 진선님의 발길질이 나한테도 향할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 그래서, 1차 승급을 치뤘음에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주술사를 하고 싶다? "
진선의 물음에 희랭은 곧바로 대답했다.
" 네! 더 이상 이렇게 비도덕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맨 처음이라도 좋으니 주술사로 직업을 옮겨주세요! 옮길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을래요! "
도적님들, 여러분의 장점을 아직 잘 모르는 이 어린 아가씨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정말 다른 도적 계열이 들으면 한 대 맞고도 성치 않을 말을 뱉는 희랭의 모습을 본 진선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바꿔줄 수는 있어. 하지만 절차가 좀 까다로운데……. "
" 저도 그 말을 듣고 해두님의 집무실에 오면 뭔가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
한 번도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희랭은 정말로 자신의 직업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절을 올려 용서를 구합니다. 도적님들- 딱 한 번 도둑질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처음한 도둑질을 나한테 곧바로 잡힌거고. 명치를 얻어맞아 시름시름 앓고있는 해두를 빼고 나와 진선은 고민에 빠졌다. 진선이 말한대로 직업을 바꿀 수는 있다.
" 문제는 소속 여부라는 것이지. 오무대신은 기억력이 좋거든. "
엥? 고작 그거 때문에?
원래 직업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일반 사람들이라면 불가능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대신선 진선과 그렇게 보이지는 않겠지만 대마신 해두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오직제도의 직업을 받은 사람들은 그 직업에 따른 특정 마력을 받게 되는데 이 마력은 그 직업에만 해당되는 것이어서 한 번 직업이 결정되고 나면 다른 직업의 마법을 배울 수 없다. 물론 직업마다 같은 이름의 마법이 몇 있지만 그건 동명이인처럼 이름만 같을 뿐 쓰는 마력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직업을 바꾸려면 먼저 해당 직업의 마력을 모조리 빼낸 뒤, 다시 바꾸고자 하는 마력을 흘려보내야 한다. 결론적으로 단순하게 마력을 소진시키는 것이 아닌 아예 그 마력 자체를 빼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직업을 아예 포기해서 마력을 자연 소멸 시키는 방법이 있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즉위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던 호동왕께서는 군사 체계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았던 시절에 누구나가 직업전향을 해서 그 체계가 흐트러지시는 염려하여 직업전향을 위법으로 공표하셨지. "
그래. 지금 직업전향은 고구려법에 위반되는 행위이다. 이게 정석이지.
" 그래서 몰래 직업전향을 하는 직파 사람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기억력이 좋은 오무대신을 직파 관리자로 임명한거고. "
진짜? 겨우 직파 사람들 얼굴과 직업이 맞는지 대조하려고 그랬던 거야? 분발해라. 국내성!
희랭은 더 이상 쏟을 눈물이 없었는지 불거진 눈동자로 진선을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그 애걸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다. 진선은 그런 희랭을 보고 훗! 웃더니 생각뿐인 나 대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해두. 홍주 가지고 있지? 잠깐 빌려갈게~ "
해두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진선은 척척 탁상 쪽으로 걸어가더니 서랍에서 홍주를 꺼냈다. 곧 진선은 희랭에게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 마로는 술을 좋아하거든. "
대패왕 마로. 그의 이름을 들은 희랭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다. 지금 진선은 마로에게 희랭을 데리고 가서 마력을 전부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 술병을 들고 있는 진선을 보니 그 방법이 조금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는 않지만.
" 흥! 직업을 초기화 하겠다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난 절대 마력을 넣어주지 않을 거다! "
해두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일어서서 콧방귀를 뀌자 진선은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 어머? 여기에 마신은 너 뿐만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
그 말에 나는 대신선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뿌듯함에 기뻐하면서도 아쉬웠다.
" 죄송합니다만 진선님. 저는 부여인이라서 제 마력을 주면 희랭씨는 부여의 기운을 가지게 됩니다. "
아! 하고 깜박 잊었다는 듯이 놀라는 진선, 그리고 어느새 그녀 옆에 쪼르르 붙어있던 희랭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부여인이다. 더불어 직파 소속으로 현사 직위로 위장하고 있는 마신이다. 물론 대마신 해두와 같은 급은 아니지만 마신인 것임은 분명하다.
대무신왕의 아들이자 현 고구려의 왕인 호동왕이 즉위하면서 내가 살고 있던 부여는 멸망을 맞이했다. 가까스로 홀로 도망쳐 나온 나는 해두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오래 가지 않아 해두와 친분이 두터운 진선도 나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여기, 고구려의 적이며 척살 대상이지만 호동왕을 보좌하는 대마신과 대신선의 도움으로 대마신의 제자라는 명목 아래 일반 병사들조차 들어올 수 없는 해두의 집무실에 눌러앉게 되었다. 참 기구한 인생이지.
" 부, 부여인이라고요?! "
쉬잇! 진선과 더불어 나와 해두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럴 때는 또 죽이 잘 맞는군. 진선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 희랭? 네 직업을 바꿔주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달게. "
이어 해두가 처음으로 진지한 눈빛으로 대신 말을 이었다.
" 내 제자의 정체에 대해서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게. 만약 트레바리의 정체가 여기 우리들 외에 다른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면 자네는 곱게 죽지 않을 거라네. "
오랜만에 보는 해두의 살기였다. 그의 주변으로 공기가 파직! 소리를 내며 공간이 진동했다. 그는 진심이었다. 이어 희랭의 얼굴이 조각상처럼 굳어지자 진선이 가차없이 해두의 머리를 내리쳤다.
" 이 바보야! 그렇다고 죽인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말하냐! "
으그헉! 알 수 없는 신음과 함께 해두가 까무러치자 살기가 그득했던 정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빌어먹을. 나조차도 움찔했다.
" 알겠니, 희랭? 너의 직업을 몰래 바꿔주는 대신 거는 조건이야. 지킬 수 있지? "
나에게 시선을 돌린 희랭의 눈빛이 변했다. 작고 검은 눈동자는 거의 경멸에 가까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선과 희랭이 집무실을 나갔고 나는 위협적이지만 크게 효과를 먹인 해두를 부축해주며 어색하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 진심이셨습니까? "
" 뭐가? "
저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마음으로 말씀하신 것이. 으악! 손발이 오글거려!
" 감싸주셔서 감사합니다. "
" 안 돼. "
" 예? "
" 네 녀석이 없으면 이 집무실은 누가 청소하라고! 게다가 심부름 시킬 사람이 없어지면 내가 힘들단 말이지. "
결국에는 나를 부려먹을 심산이었군. 빌어먹을 영감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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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의도한 스토리하고는 달리
진지한 이야기는 진부하기도 하고
저하고도 좀 안맞아서 조금 무게를
줄여보았습니다. 가볍게 쓰는 것처럼
보이시겠지만 마음은 조금 무겁게
달리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글 잘 쓰셧네요
다음편 기대할게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