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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넓은 풀밭.

이제 곧 해가 질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노을을 등진다.



세훈은 노숙을 할 채비를 하고, 커다란 바윗돌 앞에 앉았다.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앞으로 두 주일 정도는 더 가야 할 게다.


바윗돌 옆에 짐이 든 가방을 벗어 놓는다.

두툼한 옷을 한꺼풀 벗어젖히니, 저 멀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식혀 준다.

산중턱에 있는 오두막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쓰고 있던 모자를 가방 위에 걸치고, 앉음직한 돌을 하나 골라잡아 앉는다.


"앗뜨..."


낮의 따가운 햇볕에 잘 익은 돌덩이였다.


"제기랄, 운이 더러우려니 돌덩이까지.."


사실 세훈은 오늘만 해도 뜨거운 것에 두 번이나 당한 것이다.

아침엔 모닥물에 발을 데고, 길을 가던 차에 잠시 쉬어 가려고 돌에 앉았던 것이 또 화근이 되었었다.


"망할.."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던 소리는 이내 잦아들었다.

이런 정도의 일은 그냥 흘려넘긴다.

원래 당할 뻔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가방에서 텐트를 꺼내 편다.

침낭을 꺼내 안에 들어간 세훈은 지친 여행길에 이내 잠이 든다.









사흘 뒤,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처의 여인숙에 짐을 풀고, 홀몸에 지갑만 가지고 시장으로 나섰다.


세훈은 그 뒤로 안 좋은 일만 물 흐르듯 이어졌던 것이다.

돌부리에 발을 채여 넘어지고, 물병의 물을 쏟고, 귀중한 성냥이 물에 젖는 등..


기분 전환 겸 해서, 무언가 먹으려는 것이다.

사흘간 먹은 거라곤 참치 통조림밖에 없는 세훈이었다.


'나쁜 흐름은 바꾸지 않으면 좀처럼 제가 바뀌는 법이 없거든.

뭔가를 내가 직접 해서 바뀌게 해야 하는 법이지.'



광장을 지나 시장에 도착하자, 위장을 자극하는 온갖 냄새들이 세훈을 꼬드긴다.

하지만 가진 돈은 얼마 없다.

오늘내일로 여행이 끝나는 것도 아니기에, 일단 세훈은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 비쌌다.

상인들의 이야기를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애초에 이쪽 지역은 음식 자체가 비쌀 뿐더러, 요즈음 들어 돈이 풀려 있다는 것이다.

두 주일 전쯤,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한답시고 돈을 마구 찍어 내는 바람에 물건들 가격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곤란한 일이다. 이대로는 불행의 흐름을 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진 것이 없는 세훈은 터덜터덜 시장을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 때, 세훈의 눈에 조그만 칼국수집이 들어왔다.

가게 간판도 없는, 조그만 한칸짜리 가게였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가게에 들어왔다.

가게는 작고 약간 어두운 걸 빼면 별다를 것이 없는 가게였다.

가게 주인은 작은 흰색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가게 안에 맴도는 멸치 국물 냄새.

메뉴판에는 커다랗고 삐뚤삐뚤한 검은 글씨로 '칼국수 3관' 이라고 적혀 있었다.


"칼국수 한 그릇이요."

"알겠네."


노인이 말린 멸치를 몇 마리 꺼내 물에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가게 안에는 가스불 소리만이 난다.


"...자네, 여러 모로 힘든가 보군."


노인이 먼저 말을 꺼낸다.


"그렇죠.. 요즘은 누구나 힘들지 않습니까?"

"내가 말하는 건 그런 이야기가 아니네."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럼 무슨 이야기죠?"

"자신을 속이지 말게.
그 때도 그렇고, 자신을 속이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네."

"...."


가스불 소리에 물이 끓는 소리가 더해지기 시작한다.


"나도 젊은 시절에 한 번 그런 적이 있지.
철이 없던 때였어... 결국 다 들통이 났지.
나는 내 잘못을 깨닫고 지금까지 57년 동안 죄인이네.
아무리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도, 결국엔 제가 짋어지고 가야 할 짐인 게야."

".... 어떻게 저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자네가 여기 들어온 걸 보면 알 수 있지.
이 땅엔 신비한 힘이 있어. 여기는 자네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나 또한 이 땅의 힘에 끌려들었고, 지금은 여기서 살면서 푼돈이나 벌고 있지.

자네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네.
하지만 내가 저질렀던 것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네.
자네의 마음은 잘 아네..."


노인의 말에서 묻어나오는 세월의 흔적.
세훈은 얼굴을 들어 노인의 얼굴을 본다.

창 밖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퍼 보였다.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질 정도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훈이는..."

"자네를 증오하면서... 그 증오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게야.
용서도 받을 수 없지. 아까도 말했듯이,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라네."

"...."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멸치국물 냄새가 가게 안에 퍼지기 시작한다.

마음이 복잡해진 세훈이지만, 일단은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픈 짐승이기에
절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이 정도면 다 되었겠지... 여기 있네."


싸구려 칼국수.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흔한 칼국수다.


칼국수의 맛 자체는 평범하다. 하지만 무언가 가슴이 짱해졌다.
마치... 노인의 감정이 칼국수 안에 흘러 들어간 듯한..
이내 세훈은 눈물을 쏟고 만다.

"...자네에게 지도를 한 장 주겠네.
이 지도에는 내 스승님이 사는 곳이 적혀 있네.
그리고.... 그 녀석의 묘도 거기에 있지..."

"...."

"자네를 이끌어 줄 게야. 지금 자네는 평주로 가고 있겠지?
목적지를 바꿀 필요는 없네. 가는 길에 있으니까.
가서 도움을 청하게... 나보다 훨씬 도움이 되어 줄 게야.
물론 자네가 얼마나 굳센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가 좌우하겠지만...
슬프게도.. 나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있을 뿐이라네...
...그립구만..."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게를 나올 때에는 이미 장이 다 끝난 밤중이었다.

"몸 조심하게. 자네 같은 사람은 나 말고도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네.
그것을 극복하느냐 마느냐는 마음에 달려 있다네.
자네가 꼭 벽을 넘어서기를 빌어 주겠네."

"감사합니다."

세훈은 길을 떠난다.

세훈의 뒷모습이 희미해질 때까지, 노인은 세훈의 등을 보고 있었다.


"...자네도 보고 있었겠지..? 용서하게.."


그 노인의 이름은 조영이었다.












단편입니다. 여기서 끝입니다.

뒷부분 더 이상 없습니다.


추천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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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레벨:0]마왕 2009.07.05. 20:01
노인 이름은 대체 왜 나온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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